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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정리/서양 철학사

고르기아스 - 허무한 인생

by 공자- 2023.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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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링크하기 귀찮아서 그냥 내가 만든 계보를 들고 왔다.

 

이렇게 해놓고 보는 게 나도 더 편하고 척척이들도 한 눈에 흐름을 파악하기 쉬울 것 같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건 흐름이다. 타짜에서도 나왔듯 흐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 이전 시간에 우리는 소피스트가 어떤 사람들인지, 현대에 그들의 철학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저번 포스팅을 꼼꼼이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애초에 소피스트들이란 어떤 학파나 인물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소피스트란 수사학을 가르치는 일종의 지식 집단이다.

 

(참고 수사학(修辭學)이란 대중을 설득하기 위한 기술, 그러니까 웅변술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내가 적은 건 그 중에서 그나마 기록이 남아있는 소피스트들이다. 

 

본격적인 포스팅에 앞서 우리는 회의주의(skepticism)라는 단어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보통 ~주의 같은 용어는 다방면에서 쓰이곤 한다. 

 

가령 개인주의 같은 말은 법을 해석할 때, 정치적으로 사용될 때, 윤리적으로 사용될 때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마찬가지로 회의주의 역시 종교나 과학 등에서는 다르게 쓰인다.

 

하지만 보통 철학에서 회의주의라 함은 '인간은 결코 진리를 알 수 없다' 는 뜻을 품고 있다.

 

(피론이라는 소피스트가 처음 주장해서 피론주의라고도 불림. 그래서 철학적 회의주의를 말할 때 피론주의라고 하면 알기 쉽다.)

 

왜 갑자기 이 말을 하냐면 소피스트들의 대표적인 사상이 바로 회의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령 저번 시간에 배운 프로타고라스의 명언을 떠올려 보자.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했다.

 

이 말의 숨은 뜻은, 진리란 사실 인간이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젠 아무 이유없이 사진을 올리고 싶다.

저번 포스팅에서 카리나로 예를 들었듯, 어떤 여자가 예쁘다거나 못생겼다는 지식은 상대적이고,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프로타고라스는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했지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면 지금 소개할 철학자는 진리 따위는 아예 없다고 말한다. 

 

자 이제부터 고르기아스가 어째서 얼핏 듣기에 황당한 이런 식의 주장을 했는 지 아라보자. araboja. 

 

고르기아스. (B.C 485~385)

 

 

나는 철학자의 일생에 대해선 다루고 싶진 않다. 

 

그래도 중요한 흐름이라고 생각되면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는 게 좋다.

 

어떤 철학자가 왜 그런 사상을 가지게 되었나 또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르기아스는 엠페도클래스의 제자였다. 우리는 이제 엠페도클래스가 4원소설을 주장했던 철학자라는 걸 안다.

 

하지만 고르기아스는 스승의 이론에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겐 4원소라는 영원 불멸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게 이상했다.

 

그의 마음을 잡아 끈 건 오히려 파르메니데스의 사상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의 저서 '비존재에 관하여' 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1.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2. 설령 무언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3. 설사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다. 

 

우선 이 세 가지 명제는 각각 철학의 주요 분야인 존재론, 인식론, 언어에 대한 얘기를 내포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 알아보진 않겠다. 너무 복잡한 얘기가 될 테니. 

 

어차피 근대철학에 가서 존재니 인식이니 하는 얘기를 주구장창할 것 같으니 기다려 달라.

 

아무튼 이 블로그의 목적은 아는 척할 수 있을 만한 지식이다. 

 

지금부터 적을 내용은 딱 있어 보일만한 설명이니 스놉분들은 알아 두시라.

먼저 1번을 보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1. 아무것도 라는 말은 존재와 비존재를 아우르는 말이다. 

2. 일단 비존재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3. 존재가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두 가지로 존재의 존재 방식을 가정할 수 있다.

3-1. 존재가 원래 존재했다는 것과 3-2. 존재는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게 됐다는 것.

 

3-1에서 원래 존재했다는 말은 시작이 없다는 것이다. 무에서 뿅 튀어나왔다면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니까.

 

3-1-1. 시작이 없다는 말은 한계가 없다는 말이다. 

3-1-2.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 한계가 없는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3-1은 거짓이다. 

 

3-2에서 어느 시점부터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파르메니데스에 의해 부정된 사실이므로 거짓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1번 논증을 마쳤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냥 가볍게 넘겨라. 억지로 이해하려 노력해봤자 득도 없다.

 

하지만 나는 포스팅을 해야 하니 쭉 논증하겠다. 이번에는 2번을 살펴 보자.

 

2. 설령 무언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부분은 해석이 좀 애매하다. 진리라는 것이 인간의 지각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인지.

 

3번과 이어서 보자면 아마 고르기아스는 "생각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한게 아닐까 싶다.

 

가령 우리는 달에 사는 토끼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현실에 있는 어떤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가 그렇다.

 

하지만 역시 그 커피가 진리의 커피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와 생각이 애초부터 일치할 수 없으니 진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3. 설사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다. 

 

이건 언어의 문제인데 말로 풀어보겠다. 

 

예를 들어 A가 빨간색을 상상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A는 빨간색의 개념을 B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사실 그건 불가능하다.

 

아마 A B C의 세 사람이 있다고 치면 셋 모두 머릿속에 떠올릴 빨간색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감각질 같은 개념인 것.

 

이로써 1.2.3.에 대한 논증을 마쳤다. 

 

물론 내 논증은 아니고 고르기아스가 이런 식으로 논증했다는 말이다.

 

재밌는 사실 한 가지는 이 회의주의란 그 자체로 모순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회의주의자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설파하고 있으며,

 

또, "진리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는 진리는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르기아스에 대해선 이 정도만 알면 넘칠 정도로 충분하다.

 

누군가 고르기아스에 대해 말하면, "아 그 진리는 없다고 했던 회의주의자~?"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된다.

 


회의주의는 말 그대로 진리에 대해 회의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상이다.

 

후에 나오겠지만 이건 니체의 사상과 비슷하다. (니힐리즘, 허무주의) 

 

그리고 내가 보기엔 두 철학자의 삶에 대한 자세도 비슷한 것 같다.

 

고르기아스는 진리가 없다고 했다.

 

진리가 없는 삶은 허무하다.

 

진리는 없고, 있어도 알수 없고,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니,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 회의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면 삶이 허무해지고, 고독하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고르기아스는 열심히 살았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생이 허무하고, 진리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극복해냈다.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의 달인이었고, 그의 뛰어난 수사학, 그리고 로고스(언어나 이성, 이 경우엔 언어)로 사람들을 설득해 더 나은 통치자가 되려했으며,

 

범그리스적인, 그러니까 그리스인들의 단합을 도모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니체도 그렇고 고르기아스도 그렇고, 본받을 점이 있다.

우리들의 흔한 월요일 아침 모습.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허무함을 많이 느끼곤 한다.

 

특히 소셜 네트워크의 다른 사람을 보며 그런 느낌을 많이 받는다. 

 

나만 못났고, 나만 가난하고, 나만 인간 관계가 파탄난 것 같고, 

 

또 평범하게 살다간 도대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수 없어서 불안함에 휩싸이곤 한다.

 

하지만 그냥 살아라. 

 

진리가 없다고 해서, 삶의 목적이 불투명하다고 해서 열심히 살지 않는 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 확실하니까 더 가열차게 살아라. 

 

어차피 때가 되면 죽을 거, 순간을 더 행복하게 느끼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며 자존감도 열심히 채워라. 

 

비록 삶은 허무하지만 당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들을 분명한 행복이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꼰대처럼 얘기해봤다. 이런 식으로 적으면 뭔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끗-

 

3줄 요약

 

1. 소피스트는 회의론자들이었다~

2. 그 중에서도 고르기아스는 극단적인 회의주의자였다~

3. 허무주의에 빠지지 말고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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