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리뷰는 역시 잡설로 시작하겠다.
그간 본 것도 읽은 것도 참 많지만 포스팅 할 시간이 나질 않았다.
...사실 변명이다. 시간은 있었다.
다만 기력이 없었다.
처음에 블로그나 개설해 볼까? 생각했을 때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실제로 초반 포스팅은 가벼운 마음으로 썼다.
쓰면서 재밌기도 했고.
하지만 쓰다 보니 포스팅도 꽤 많은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무엇보다 내 성격이 문제였다.
쓸데없이 완벽주의자 경향이 있어서, 가볍게 써도 그만일 포스팅을 몇 번이나 퇴고해버리고 만다.
이제 다 내려놓기로 했다.
즐겁게 포스팅 하는 게 최고인 거시다.
비록 활자 너머지만, 쓰는 사람이 즐겁게 쓰면 읽는 사람도 분명 그 기분이 느껴지니까.
단순하게 줄거리부터 요약해 보겠다.
미지로 가득 찬 거대한 구멍 어비스.
주인공 리코의 어머니는 그 속의 귀중한 고대 유물을 구해 오는 일명 탐굴가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리코의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뎅그러니 발견된 어머니의 유품 속에는 쪽지 하나가 있었다.
'나락의 끝에서 기다리겠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본 리코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직접 어비스 속으로 뛰어든다...
맞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거 탑등반물이다.
그 전에 잠깐.
등반물이라는 장르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짚고 가겠다.
구질구질한 설명 대신 작품으로 예시를 들자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원조격인 탑등반물은 신의 탑 정도가 있겠다.
신의 탑이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이긴 하지만 물론 원조는 아니다.
장르의 원조를 따지는 것은 물론 의미 없는 일이긴 하다.
그래도 몇 가지 꼽아 보자면 마법진 구루구루 같은 일본의 던전물이나 미궁물. 혹은 게임.
혹은 이소룡의 사망유희, 그 뒤의 킬빌. 그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한 짝패의 최후씬 등등 아주 많다.
아무튼 탑등반물이란, 한마디로 어떤 초월적 공간인 '탑'을 한 층 한 층 공략해 나가는 플롯이다.
이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된다.
메이드 인 어비스도 이 기본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가 설정한 탑이 있고, 주인공 일행은 탑을 한 층 한 층 등반한다.
(물론 여기서는 지하이기 때문에 탐굴한다.)
메이드 인 어비스의 재미 포인트는 여러가지가 있다.
영상미도 수려하고, 잔혹한 표현도 서슴치 않으며, 배경도 뛰어나며, 캐릭 조형도 섬세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상상력을 맛보는 재미가 가장 크다.
일뽕이 아니라, 이런 크리쳐 디자인은 일본이 압도적으로 잘하는 것 같다.
작품 내에는 무수한 동식물과 지형이 나오는데, 각각의 생김새나 발생 원인이 전부 합리적이며 세계관과 맞는다.
또 그 모든 크리쳐에 세세한 설정이 달려 있으며, 그 설정은 다시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외형에 드러난다.
내 생각에 판타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것이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점이다.
먼저, 작품 속에서 다른 세계가 가지는 단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어떤 세계를 알기 위해선 사고와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고와 이해는 필연적으로 정신력 소모를 수반한다.
요약하자면 모르는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탐구하는 것은 머리 아픈 일이라는 것.
하지만 반대로 그 점이 현대 소설에선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장점이 될 수 있다.
사실 이야기의 본질이 그렇지 않은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관찰자 입장에서 엿볼 때 오는 그 쾌감.
이때 다른 세계의 주인공에게 온전히 몰입할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럴 때 세계관이 탄탄하면 탄탄할수록,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메이드 인 어비스의 세계관은 탄탄하다.
적어도 빈약한 세계관으로 거창한 서사를 풀어낼 때 느껴지는 이질감은 없다.
앞서 크리처 디자인을 언급했지만 캐릭 디자인도 정말이지 뛰어나다.
겉보기엔 둥글둥글 단순하지만 파다 보면 깊이가 있다.
(예컨대 그냥 장식용인 줄 알았던 소품에 적절한 쓰임새가 있었다던지.)
나는 이런 설득력 있는 디자인을 좋아한다.
가끔 애니 속 너무 잔인한 장면이나, 어린아이에 대한 성적 묘사가 불쾌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단언컨대 그런 감상은 전부 무시하면 된다.
세상 어떤 작품도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애초에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출 수는 없다.
불편한 사람은 안 보면 되고, 볼 사람은 보면 된다.
세상에는 길거리의 쓰레기를 보고 영감을 얻는 예술가도 있고, 위대한 예술품을 쓰레기 취급하는 인간도 있다.
물론 핍진성이나 개연성에 어긋나는, 등장함으로써 전체 흐름이 깨질 만한 고어 요소는 나도 반대한다.
하지만 메이드 인 어비스의 세계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며, 작가도 작품 내에서 그 점을 충분히 어필하고 있다.
오히려 여러 애니에서, 의도적으로 생략한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에 나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일단 고어한 장면이 좋건 싫건, 그런 장면이 긴장감과 몰입감을 높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세계를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지루하지만, 이 애니는 2기 내내 지루함이 별로 없었다.
(사실 자극적인 사시미 깡패 조폭 영화가 일정 수준의 관객을 보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불어 이 애니의 잔인하다 못 해 질릴 정도의 고어씬은.
반대로 인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작중 인물들은 언제나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고, 또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안방에 누워 지켜본다.
나는 그것이 삶의 소중함에 대해, 또 타인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팔이 없는 장애인을 보며 내 팔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일견 추한 사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고의 미추를 판단하는 일이, 차라리 내겐 더 추한 일이다.
아름다운 사고와 추한 사고란 없다.
그냥 그런 사고가 있을 뿐이다.
잡설이지만 개인적으로 새롭고 특이한 세계관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는 위와 같다.
대표적으로는 매트릭스가 있을 테고, 외에도 사이버펑크, 눈물을 마시는 새, 옥스칼니스의 아이들, 아바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등 많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세계관을 창조하는 작가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서, 사실 좀 비통하다.
잡설의 잡설이지만, 이런 얘기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대머리 아저씨가...
아니,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정확히는 작가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타나토 노트의 작중 인물의 대사다.
그렇지만 어차피 작중 인물은 전부 작가의 분신들 아니겠는가.
타나토 노트의 라울이 이런 말을 했다.
"오디세이아가 현대에 나왔다면 아마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 했을 거야. 세이렌이니 키클롭스니 웬 괴상한 것들이나 나오니까. 아마 유치한 환상문학, 판타지 정도의 취급을 받았을 테고. 우리 같은 어린 아이들에게나 읽혔겠지."
기억에 의존했으니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무튼 이런 기조였다.
(근데 요리 봐도 저리 봐도, 베르나르 본인이 비판하고 싶은 점이 맞는 것 같다.)
이 외에도 다른 대사 하나가 더 떠오른다.
정확하진 않다.
아마 이런 대사였다.
"너도 뾰루지에 시달렸던 경험을 10장 정도로 써 봐. 혹시 알아? 콩쿠르 대상을 받을지."
이것도 순수 문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분명하다.
나는 이 생각에 동의한다.
소설의 가장 큰 재미는 역시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문학에는, 특히 한국 문학에는 그 상상력이, 몇몇 사람들의(실은 그다지 많이 읽지도, 보지도, 쓰지도 않는) 불편함으로. 또 그 불편함에 기인한 각종 검열로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참고로 1월 달에 읽었던 3편의 소설은, 다 읽고 나니 전부 퀴어 문학이었다.)
이영도 작가 식으로 말하자면, 독창적 세계관이라는 말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가 돼버린 게 아닐까.
씁쓸한 것 같기도.
여담으로
작가가 로리콘인 건 확실하다.
흠흠. 크흠. 그냥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작자로서의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하지만 애니를 보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리뷰는 여기서 끝이다.
매번 쓰다 보면 애니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 전반적인 얘기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초카와이 나나치짤 뿌리고 간다.
아. 나는 나나치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 시발 퍼리 좋아했었네?
메이드 인 어비스
★★★★☆
한줄 평
터무니없이 귀여운 잔혹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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