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리뷰할 책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다. 두둥.
현대인을 위해 선요약 들어간다.
상당한 수작이다. 그냥 주인장 믿고 읽으면 된다.
사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던 소설이라 큰 기대가 없었다.
그래서 더 즐거웠다.
내가 리뷰에서 스토리를 줄줄 읊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끔 등장하는 이런 소설을 만날 때 무엇보다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 하지만 오늘도 역시 본격적인 리뷰 작성에 앞서 잡담부터 늘어 놓겠다.
역시 책과 완전히 관련 없는 내용은 아니다.
사실 나는 작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리면 선입견을 가지고 작품을 대하는 편이다.
선입견이라는 워딩을 보자마자 일단 부정적인 마음이 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무의식을 통제할 수 없다.
더불어 '뚱뚱한 사람은 게으르다' 거나, '부자는 전부 쩨쩨하다' 거나, '시골 사람은 무식하다'는 등의 대표적인 선입견은 사실 통계라고 할 수 있다.
개개인에게 적용되지 않을 뿐 대체적인 인과관계도 성립한다.
아무래도 게으르니까 뚱뚱해졌을 테고, 소비에 인색하니 부자가 되었을 테고, 시골에 사니 변변찮은 교육을 받지 못해 무식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게으름' '쩨쩨함' '무식함' 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저 상태 명사들은 내게 그냥 그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말로 그 뿐이다.
따라서 내가 여성 작가에게 선입견을 가진 채 작품을 대하는 것 역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요즘 시대, 특히 한국에서 이런 말을 하기가 좀 꺼려지긴 한다.
아마 내가 공인이었으면 무서워서 끝내 말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여긴 내 일기장이나 다름 없는 공간이니까 그냥 적는다.
남녀의 차이는 확실히 존재하며, 여성적 문체와 남성적 문체도 분명히 존재한다.
현재 35세 이상은 살아오면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아마 최근에 접했을 것이다.
철학사에서 말했지만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사실 이 경우엔 좀 다름.)
그 시대에는 분명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사회적 보편이 존재했고, 그 세대는 그 단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적어도 35세 이상의 남녀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신체의 차이가 도드라진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반대다.
겉으로 봐서 남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는 많지만, 장편 소설을 보고 작가의 성별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글이란 사상의 노출이다. 어떻게 가리려고 해도 끝끝내 보여지고 마는 것이 글이다.
가발을 써도, 치마를 입어도, 반대로 머리를 삭발하고, 거친 행동을 해도 글에 나타난 사상은 지울 수 없다.
물론 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척척이 여러분. 아시죠?
잡설은 여기까지 ㅎㅎ 갑자기 떠올라서 적어봤음.
슬픔에는 두 가지가 있다.
눈물 콧물을 쏟아내게 만드는 격정적인 슬픔과,
반대로 사람을 멍하니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잠잠한 슬픔이 그것이다.
비극도 그렇다.
숨 쉴 여유도 없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당시엔 몰랐다가 격랑 속에서 빠져나온 뒤에야 간신히 깨닫고 마는 그런 비극이 있다.
다섯째 아이는 모두 후자에 속한다.
소설 자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가볍고 가벼워서 술술 읽힌다.
특히 소설의 중반쯤부터 독자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다리가 진창에 빠져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발부터 시작해 서서히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한 묘한 느낌.
그만큼 작가가 해리엇의 심리 변화를 몰입감 있게 잘 다루었다는 방증이다.
보통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는 알 수 없는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이 작품은 예외다. 전혀 없다.
오히려 행동을 통해 심리를 드러내주는 묘사들이 너무 찬란해서 감동까지 받았다.
나는 항상 좋은 문장이 있으면 따로 메모해두는데, 이 책에서 뽑아낸 문장들은 이렇다.
그들은 그들 또래가 흔히 그렇듯, 순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도 사실은 전통의 진수였다.
돈은 항상 빠듯했다. 절약해야 했다. 중고인 거대한 호텔용 냉장고에다 여름 과일과 야채를 가득 채웠다. 과일과 잼과 각종 양념들을 병에다 저장했다. 빵을 구워서 집안에 빵 굽는 냄새가 가득 찼다. 이것이야말로 옛날식 행복이었다.
이질적인 삶의 두 형태가 만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오랜 어떤 원시의 피가 일부가 되어 아직도 그것으로 피가 흐르고 뛰고 있었다.
내가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오그라듦이나 묘한 이질감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내가 남자라서일 확률이 높다.
당연히 여성들의 심리에는 잘 공감이 가질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별이 반대인 경우에도 이런 이질감은 존재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을 보는 독자층에 따라 대개 남성향, 여성향이 뚜렷이 갈리는 것이고.
그런데 이 작가는 상당히 진취적이고 남성적인가 보다.
물론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느끼기에 그렇다. 짧은 호흡의 문장이나, 사유가 겹치는 부분이 꽤 있다.
뭐, 여러 번 말하지만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다.
실제로 작가들 중엔 글을 보고 성별이나 연령을 뚜렷이 알 수 있으면 나쁜 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인정한다. 작가와 작중 인물이 적절한 거리두기를 하지 않으면 자서전이나 에세이가 돼버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러니까 혹시 이 포스팅을 보게 될 당신들도 내 사고를 인정해라.
아무리 노력해도 이야기가 길어지면 결코 숨길 수 없는 성적 가치관들이 드러난다.
결론을 말하자면 좋은 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전개가 빨라서 좋았다.
이게 어떤 문단에서는 잉? 할 정도로 시간이 휙휙 순식간에 흘러가버린다.
여름이었다가, 다음 문장에서 곧바로 예고 없이 겨울부터 시작하는 식이다.
당연히 둘 사이에 호응이 어색하다면 비평했을 테지만, 전개에 전혀 지장이 없고 오히려 좋은 쪽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참고로 밑에 적은 건 쓰잘데기 없는 얘기다. 안 읽어도 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주인공인 해리엇은 멍청한 여자다.
이 경우 멍청하다는 것은 앞일을 멀리까지 내다보지 못하며, 자신이 내다보지 못한다는 점도 파악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태도를 총칭하는 말이다.
해리엇은 치명적인 실수를 두 가지 저질렀다.
첫 째로 신중하고, 배려심 깊으며, 참을성까지 풍부한 남편과 어머니의 말을 끝내 듣지 않았다는 점.
해리엇은 행복해지길 바라며 무작정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아이를 낳으면 낳을수록 불행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현실이 그렇다. 어느 사회건 마찬가지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단 한 푼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에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적어 놓고 보니 명언이다. 오늘의 한줄 평은 이걸로 해야겠다.)
해리엇은 이상에 눈이 멀어 그 사실을 간과했다.
두 번째는 자식을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물론 어쩔 수 없다. 그건 짐승에 대해 가지게 되는 일종의 본능이다.
우리 사회에는 언제나 사회화가 덜 된, 이른 바 규격 외의 인간들이나 이레귤러 혹은 짐승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해리엇이 유독 불행했던 건 짐승을 제 자궁에 잉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멍청한 여자는 정말 행복했을까?
결코 사회화되지 못하는 짐승을 기어코 성년까지 길러내서는,
순박한 시민들 틈에 제 멋대로 풀어놓고 나서 기어이 자신의 모성애의 한 자락을 붙잡으며 행복감을 느꼈을까?
더불어, 유연하고 사려 깊은 데이비드를 끝내 딱딱하고 고루하며 별볼일 없는 남자로 만들어릴 만큼,
또 벤을 제외한 아이들에게 맹수와 한 우리에서 살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 만큼,
그러니까 최종적으로는 그녀 주위의 모든 것들을 몇 번이나 진창에 차 넣고서도,
모성애라는 것은 쟁취할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숭고한 것이었을까.
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
한줄 평
행복해지기 위해서 돈은 불필요하다. 다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선 다소 많은 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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