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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고리오 영감 - 오노레 드 발자크

by 공자- 2023.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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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at.

 

오늘 리뷰할 책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다. 

 

빠른 도파민 분비를 좋아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선 요약 들어가겠다.

 

그냥 읽어라. 이게 고전이고, 이게 이야기고, 이게 삶에 대한 통찰력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리뷰 전에 오늘도 일단 여담부터 늘어 놓겠다.

 

내 방 한쪽 벽면은 큰 책장이 차지하고 있다. 

 

만화책도 있고, 라이트 노벨도 있고, 잡지도 있고, 공부하던 책과 노트도 있고, 당연히 소설들도 있다.

 

보통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도 집에 책장은 항상 놓여 있다. 

 

가득 찬 책장을 보면 괜시리 똑똑해진 것 같기도 하고, 또 책은 사실 인테리어 목적으로 써도 훌륭하기 때문이다.

 

가지고 싶다.. 하지만 집이 너무 작다 ㅠ

하지만 내 책장은 더럽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이라 정정한다. 정확히는 책이 더럽다. 

 

내 블로그의 포스팅을 유심히 본 척척이들은 알겠지만 내 취미는 두 가지다.

 

목욕하기와 독서하기. 보통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

 

책을 물에 빠뜨린 적도 심심찮게 있기에 정말 상태가 메롱인 책들도 많다.

 

더불어 나는 정말 인상 깊은 구절이 있을 땐 그 페이지를 그냥 반으로 큼직하게 접어버린다.

 

나중에 아무 책이나 꺼내 들었을 때 접힌 부분을 다시 보기 위해서다. 

 

내가 왜 서론을 이렇게 시작했느냐면... 

 

'고리오 영감'은 내 책장의 책들 중 가장 많은 페이지가 접혀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반부에 <보트랭>의 대사는 정말 감명 깊어서 모든 페이지를 다 접어놓았다. 

 

참고로 보트랭 이 자식은 중반에 거의 20페이지 가까이 혼자서 말한다. 

 

현실이었다면 바로 투머치토커 찬호 형님 취급을 했겠지만 소설은 다르다.

 

아니 보트랭은 다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보트랭이란 인물은 내가 추측하건데 작가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내 얘기를 하고 싶지 남의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래서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건 힘들다. 

 

하지만 글에 공감이 되는 순간 독자는 활자를 뛰어 넘어 작가와 직접 소통하는 신기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

 

결국 수단의 차이일 뿐이다. 

 

그 사람과 공기 중의 음성으로 소통하느냐, 혹은 활자로 소통하느냐의 차이. 

 

어쩌면 후자가 훨씬 더 명확할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우리는 대면한 사람의 메세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제스처를 취하면서 '너 참 예쁘다.' 라고 말하는 걸 상상해보라. 그때 우리는 메세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까?

메세지보다는 무조건적으로 메신저에 먼저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제스처를 취하며 말하는지, 시선은 어디로 향하는지, 억양과 어조는 어떤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이 모든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메세지의 본질을 흐려버린다. 

 

텍스트로 하는 대화는 그런 면에서 가끔 더 효율적이고, 더 진심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위에선 보트랭의 대사를 예시로 삼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다. 

 

글을 쓰는 입장으로써 감히 말하건데 이 소설은 모든 문장에서 고심한 티가 난다.

 

고심이라 해야 할까. 퇴고나 첨삭이라고 해야 할까. 

 

문장이 굉장히 유려하고 묘사가 굉장히 익살스럽다.

 

나는 좋은 표현들이 나오면 항상 메모해 둔다. 

 

물론 약간 변형시켜서 내 글에 써먹기 위해서다.

헤헤.. 비난은 삼가 달라. 원래 창작이란 다 그렇고 그런 거니까.

보통 책 한권에서 가장 인상 깊은 두 세가지 정도의 표현을 뽑아내는 편이다.

(뽑아낸다고 하니 마치 이걸 위해 책을 읽는 것 같다. 오해다.) 

 

그리고 고리오 영감에서는 수 십 가지 표현을 뽑아냈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다. 

 

"당최 그 자식은 얼마나 구두쇠인지 부엌 냄새로 배를 채울 수 있을 놈이다."

 

'함부로 억측하는 늙은 여자의 못된 버릇.'

 

"인간들은 악덕은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다르거나, 이상하거나, 우스꽝스러운 것은 용서하지 못하거나 지나치지 못하는 법이다."

 

"머리가 텅 빈 사람들의 괴상한 논법에 따르자면, 쓸데 없는 얘기만 늘어놓는 자는 경솔하며, 자신의 사업에 대해 결코 떠들어대지 않는 인간이란 나쁜 짓을 하는게 분명하다는 식이다, 그래서 사업가는 사기꾼이 되었다."

 

문장을 메모해 둘 때 변형을 미리 하기도 해서 정확하게 옮겨 적었는 지는 모르겠다.

 

뭐, 한번 읽은 책을 문장 찾자고 다시 펼치기도 귀찮다. 

 

대강 맞을 것이다.

 

 

아마 이런 문장들이 어째서 내 심금을 울렸는지, 뭐가 그리 좋은 문장인지 이해되지 않는 척척이들도 있을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단어와 문장이란 맥락 없이는 어떤 의미도 없다.

 

저 문장들은 표현이 재밌거나, 전후 맥락을 고려했을 때 더 좋은 문장을 찾기 힘들만큼 적절했기 때문에 적어두었다.

 

그보다 얘기가 자꾸 딴 데로 샌다.

 

리뷰 하라니까 내 얘기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나 요즘 외로운가?

 

각설하고 소설의 구성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전반부는 꽤, 아니 많이 지루하다. 

 

고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을 보면 초반부가 지루한 경우가 많다.

 

특히 묘사... 전개에도, 빌드업에도, 구성에도 아무 관련 없는 사물 묘사가 항상 등장한다. 

 

감히 말하건데 이건 옛날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때는 나도 주구장창 이런 식으로 묘사를 했지만 최근 트렌드에는 정말 맞지 않다.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면,

 

 

집과 작은 정원 사이에는 폭이 한 간쯤 되는 자갈 덮인 빈터가 있다. 그 앞에는 모래 덮인 오솔길이 있다. 길 가장자리에는 제라늄, 협죽도, 청백색 도자기 화분에 담긴 석류나무들이 있다.중문 위에는 간판이 하나 붙어 있다. 그 위에는 <보케르 집. 남녀 모두 받는 고급하숙집>이라고 적혀 있다.

요란한 초인종이 붙은 살문, 작은 포도의 끝, 길 맞은편 담장 위로, 그 지역 화가가 모델로 삼은 녹색 대리석 아치가 보였다. 이 아치 떄문에 가려서 보이지않는 움푹 들어간 곳에 큐피드 동상이 서 있었다. 상징에 취미가 있는 사람은 동상에 남아 있는 칠 벗겨진 니스 자국을 보고서,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성병 병원에서 치료되는 파리에서의 사랑의 신화를 어쩌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동상 받침돌 밑에는 반쯤 지워진 다음과 같은 비명이 적혀 있다. 길이와 넓이가 건물 정면만한 작은 정원은 도로변의 담과 옆집 담으로 에워싸여 있다. 옆집은 등나무가 망토처럼.... 과수장과 포도나무로 덮여 있다.... 보리수나무.... 식용 식물인 아티초크를 심고, 거기에 방추형으로 과일나무들이 서 있고...

 

인용문 쓰려고 결국 다시 책을 펼쳐버렸다.

 

고리오 영감에서는 이런 풍경 묘사가 몇 페이지나, 몇 페이지나 계속해서 이어진다. 

 

추억보정이라 그런가 지금 보니까 또 볼 만하다. 그래도 처음에는 지루했다.

 

이런 묘사들과 더불어 해학적인 요소들이 또 소설을 읽기 힘들게 만든다.

 

책의 마지막 해석에서 보자면 프랑스 문학에서는 최초로 <대시 dash>를 문장 가운데 썼다거나,각종 방언, 특수 용어, 다른 나라의 은어, 전문 용어들을 과감하게 썼다고 한다.

 

좋다. 가끔 사람들이 왜 굳이 쉬운 말을 놔두고 어려운 말을 쓰는 지 나는 안다.

 

복잡하고,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은 그 자체로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쓴다.

 

내가 알 수 있는 이유는 나도 글을 쓸 때 그런 유혹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굉장한 진입 장벽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가령 <보케르 하숙집>에서 나오는 익살스러운 대화란 이런 식이다.

 

 

「아! 아! 훌륭한 <수포라마(수프)>가 들어오는군.」
「<푸아르르르르르레트>, 망했구나!」
「<코르>, 누유. <코르>,느뮤즈. <코르>, 날린. <코르>, 니숑. <코르>, 보.<코르>, 나크. <코르>, 노라마.」
「<코르> 오 피에라는 말이오 영감님.」
*참고로 코르는 발에 생기는 티눈 같은 것이다.

 

이 외에도 갖가지 프랑스식 언어 유희가 등장한다. 

 

일본으로 치면 니시오 이신 같은 개그랄까.

 

유쾌하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사실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맥이 뚝뚝 끊긴다. 

 

오래된 게임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다.

요새 흔히 하는 말로 진입장벽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경제 용어로도 쓰이지만 창작물을 감상할 때도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너무 복잡한 게임은 새로운 사람들이 진입하기 어렵다. 그럴 때 쓰인다.

 

<고리오 영감>도 이런 진입장벽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렇게, 그러니까 길가의 돌멩이조차 하나하나 전부 묘사하는 고전의 특성은 진입장벽을 높이고, 또 높인다.

 

고전 깨나 읽어봤다는 나도, 즉 고전의 고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나도 초반부의 지루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묘사하고 있는 배경이 우리나라의 풍경도 아니다. 

 

문장을 통해 상상이야 할 수 있지만 공감할 수 없는 상상은 언제나 지루한 법이다. 

 

프랑스의 거리가 어떻게 치장되어 있는지, 한국의 독자들이 알 게 뭐람.

 

더불어 이 시기의 작품이 읽기 어려운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현대 문학은 보통 서술을 미리 한 후 대화를 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면 A와 B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하자. 

 

A는 B에게 말했다. "너 참 예쁘다." B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하지만 고전 문학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너 참 예쁘다." A가 말했다. "고마워." B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게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등장인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읽기 힘들어진다. 

 

아마 고전을 많이 읽으시는 분들은 공감하는 얘기일 것 같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보자면 양쪽의 장단점이 있긴 한데...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쓰기 어렵다.

 

대화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만한 특징을 무조건적으로 집어 넣지 않으면 흐름이 끊기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리오 영감>은 이런저런 진입장벽이 많다. 읽기 힘들다.

 

하지만 그 진입장벽을 넘으면 새로운 길이 보인다.

 

이게 말로는 쉽지만 진입장벽을 넘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요즘 창작물들은 이런 진입장벽, 즉 지루한 구간을 만들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기 때문이다.

 

최근에 봤던 것 중에 떠올려 보자면 <더글로리>가 그렇고, <최애의 아이>가 그렇다. 

 

언급한 두 작품이 아니더라도 트렌드가 그렇다. 

 

묘사는 줄이고, 전개는 빠르게, 문체는 간결하게, 플롯은 대중적으로.

 

그럼에도 진입장벽을 넘어라.

 

나는 재미 없는 소설은 절대 남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기껏 지루한 부분을 참고 참고 참고 읽었는데 마지막까지 지루하다면?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작품을 졸작이라 부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졸작으로 평가했다고 해서 그 작품이 정녕 졸작이 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사람들이 재미는 느끼는 부분은 모두 다르니까. 

 

각설하고 이 소설은 아무튼 재밌었다. 

 

초반은 지루했지만 보상하듯 후반부의 몰입감이 엄청나다. 

 

앞서 말한 보트랭의 스무 페이지 가량 독백 후로 호흡이 빨라지고, 전개가 눈에 보이고, 인물들의 행동도 전개에 맞춰 시원시원하게 이루어진다. 

작가는 프랑스 사람이고 우린 한국 사람이다. 

 

살아온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건, 사고하는 방식 또한 완전히 다르다는 말과 같다. 

 

사막에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과, 해운대 마린시티에 사는 사람이 바다에 가지는 심상이 전혀 다른 것처럼.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인간이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무슨 사고를 하건 우리가 같은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거창하게 말하기 싫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다~ 라는 말이다. 

 

<고리오 영감>에서의 파리는 분명 부패해 있다. 

 

작중 나오는 살롱과 파티 문화. 쇼윈도 부부. 파리 여성들의 허영. 그 허영을 위해 막대한 채무를 지는 귀부인들. 성공하기 위해 계급을 높이려는 소시민들의 발버둥. 범죄자. 인간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편견. 진정한 사랑. 갖은 오해.

 

도무지 인간답지 않다고 느껴지는 당시 파리의 거리와, 귀부인들의 살롱은 그럼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며, 아주 가끔이지만 진정한 사랑도 싹트는 곳이다.

 

그리고 나열한 모든 것들은 작가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으로 인해 약간은 축축하고, 약간은 기분 나쁘게 더럽혀져 있다. 

 

사실 어떤 사회건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 청년들이 느끼는 불공정함에 대한 분노. 

 

여성들이 느끼는 성차별이나 불평등. 혹은 무기력증.

 

노인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허탈함. 

 

파리건 한국이건 다 똑같은 무게의 고민들이다.

 

다만 화이트 칼라에 속하는 사람이 블루 칼라에 대한 글을 쓰기는 어렵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직업이나, 어떤 특정 부류들의 심층을 파고드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회 고발적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부조리를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맞부닥치지 않으면, 똥물에 머리까지 깊숙이 담궈 보지 않으면 쓸 수 없다.

 

이 작가는 <보트랭>을 통해 파리의 모순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으며, <보케르 하숙집>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담담하게 비참함을 풀어낸다. 

 

실제 작가의 생에 대해선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작품만 보는 편이다. 

 

그럼에도 알 수 있다. 작가는 양심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작가 본인이 더 이상적이고, 더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기에 나온다.

 

애초에 양심이나, 덕이 없는 사람이라면 현실의 부조리에 마음 아파할 이유도 없다.

 

쓰다 보니 포스팅이 길어졌다.

 

핵심만 짚고 넘어가는 게 블로그의 지향점인데... 술 마시니 조절이 안된다.

 

에라 모르겠다. 가끔 이런 마무리도 괜찮다. 

 

고리오 영감에서도 이렇게 마무리 했으니까 ㅋㅋ

 

끗- 

 

한줄 평  <고리오 영감> ★★★★☆

 

인간이 품은 덕성이란 잘게 쪼개지지 않는다. 있거나. 혹은 없거나. 둘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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