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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늑대 아이 - 예술이란 무엇인가 (2)

by 공자- 2023.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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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애 둘 낳은 엄마의 미모? 가슴이 웅장해진다.

지난 포스팅에서 (https://gongja.tistory.com/37) 나는 좀 험하게 말했다. 

 

사실 속마음을 말하자면 험하게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남들이 보기에 그렇겠구나, 하고 유추할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뭐 생각은 변함이 없다.

 

과감하게 다시 말하겠다. 한 가지 장르만 고집하는 인간은 편협하다.

 


아무튼 예술에 급을 나누는 인간은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한 예시를 몇 가지 들자면.

 

그림쟁이들은 회화를 높게 치고, 만화를 낮게 친다.

 

음악쟁이들은 클래식을 높게 치고, 대중 음악을 낮게 친다.

 

글쟁이들은 순수문학을 높게 치고, 웹소설을 낮게 친다. 

 

물론 그 안에서도 다시 급이 나뉜다. 

 

가령 영화에서는 상업 영화냐 예술 영화냐, 대중 음악에서도 발라드냐 아이돌 음악이냐 등등.

 

이는 직업에서도 흔히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가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급을 나누는 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카테고리화를 참 좋아한다. 

 

과일을 과일로 두지 않고 사과, 딸기, 망고, 바나나 등으로 나누는가 하면,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성격마저 별자리, 사주, MBTI 등으로 세분화 시켜 놓는다. 

 

세상 모든 것들은 전부 분류가 되어 있고, 또 분류되지 않은 항목들에 대해선 분류해 놓고 싶은 욕망이 든다.

 

참고로 예수는 이런 카테고리화를 싫어했던 사람이다.

 

사랑 하나로 모든 것을 퉁쳐버리는 그의 사상이야 말로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뭐 주인장은 크리스천도 아니고 무교에 가까우니 이런 사족은 접어두자.

 

아마 원시에선 이런 분류가 아주 중요했을테니 (독이 든 것과 들지 않은 것) 본능으로 남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결론적으로 무슨 말이 하고 싶냐면...

 

이렇게 열심히 급을 나누는 부류들은 거의 확정적으로 이중성에 찌들어 있다는 비판을 하고 싶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애초에 예술성이라는 것의 경계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특히 한국에는 아직도 영화가 애니메이션보다 급이 높다고 생각하며,

발라드 가수가 아이돌보다 더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식의 인식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결론을 내렸다. 

 

사람이 모든 것에 급을 나누는 이유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공감하는 일에 미쳐있기 때문이다.

 

얼핏 듣기엔 엉뚱한 결론일지도 모르지만, 설명해 보겠다.

 

사람들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중 왜 일반적으로 영화를 선호하는 걸까?

 

내 답은 이렇다.

영화는 실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고, 애니는 가상 세계에 있는 가상의 인물을 다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창작물을 볼 때 자신을 창작물 속 인물에 대입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주인공이건 조연이건 악역이건 상관없이 그렇다.

 

그렇다면 영화와 애니 중 어느 쪽이 더 자신을 이입하기 쉬우며, 또 공감하기 쉬운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당연히 실제 사람이 나오는 영화 쪽이다.

그림에 감정을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데포르메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그렇다.

 

물론 이런 생각은 내 독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기저심리가 아니라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령 칸트는 예술을 놀이라고 했고, 헤겔은 정신이라고 했으며, 플라톤은 미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했다. 

 

놀이는 실제 사람과 하는 것이 가장 재밌고, 정신은 그야 사람의 것이고, 사랑도 그렇다.

 

그래서 셋 다 와닿는 얘기지만 나는 이중에서도 플라톤의 말이 가장 와닿는다. 

 

비슷한 영상 매체라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무래도 무정물을 사랑하는 것보다 낫다고 느껴진다.

그것이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다른 주제로 넘어가 보자면, 이렇게 작품의 실질적인 '질'을 따져서 급을 나누는 건 사실 지극히 무의미한 일이다.

 

예술성이나, 심미성, 혹은 작품의 질은 어차피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윗 부류들을 이중성에 찌들어 있다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절대적 진리는 없지만 논리적으로 보자면 결국 어떤 사안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절대적이거나 혹은 상대적이거나. 

 

예술성에 대해 적용해보자면, '급 나누기 좋아하는 어떤 A는 예술성에 대해 절대적이거나 혹은 상대적인 관점' 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잠깐 논증 형식으로 진행해보겠다.

 

여기서 급 나누기 좋아하는 어떤 A의 입장을 들여다보자. 

 

1. A는 예술성에 대해 절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1-1. 예술성이 절대적이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어떤 예술 작품 a와 b는 정량적인 예술성 수치를 가지게 될 수 밖에 없으며, A는 그것을 평가하게 된다는 말이다.

 

1-2. 하지만 현실에서 어떤 평론가의 입장이나 대중들의 의견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예술성의 정량을 매길 수 있는 수단도 없다.

 

따라서 A가 예술을 절대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모순적이다. (혹은 A는 예술성을 정량화 할 수 있는 신이다.)

 

2. 위의 논증에 따라 A가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예술, 혹은 예술을 상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2-1. 모든 예술을 상대적인 관점으로 볼 수 밖에 없다면, 어떤 작품 a에 정량적 예술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1. 정량적인 예술성이 없다면 당연히 예술성에 따른 급을 나눌 수 없다.

 

따라서 급을 나누는 A의 행동은 그 자체로 이중적이다.

 

장난식으로 해 본 논증이지만 그리 틀린 점은 없을 것이다.

 

즉, 예술에 급을 나누는 사람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자신이 높게 평가한 작품 a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높게 평가한 작품 b에 대해선 한없이 상대적인 관점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진정한 상대주의자라면, 어떤 작품 A가 배설물에 가깝게 느껴진다 해도, A를 고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관점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그와 더불어 자신이 특별한 심미안 따위는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상대주의다.

 

이건 좀 별개의 얘기지만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도 인정받기 어렵기도 하다.

타인을, 타인이 귀하게 여기는 가치를 온전히 인정해 주다 보면, 나중에는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중적인 사람들의 얘기는 여기까지. 다시 다른 주제로 넘어가겠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왜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는지는 알 것 같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양산형 애니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생각하는 양산형 애니란 흥미를 자극할 만한 요소들과, 상황을 끊임없이 집어 넣음으로써 별다른 내용은 없지만 계속 보게 만드는 애니를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클리셰를 덕지덕지 발라 놓은 작품들이다.

 

예를 들어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라는 캐릭터가 나온 이후로, 단발 쿨뷰티 냉랭계 미소녀들이 판을 쳤고,

 

마마마(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이후로 마법 소녀물이 범람했고,

 

또 최근에는 소드아트온라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애니는 물론, 웹소설계에서도 주구장창 비슷한 이세계물만 쏟아지고 있다.

 

굳이 한 가지 더 말하자면 '82년생 김지영'이 성공하자 한국 문단에는 페미니즘 관련된 서적만 쏟아지고 있다.

(솔직히 고백한다. 이 현상 때문에 읽을거리가 없다.)

 

이런 이유로 인해 애니에 대한 인식이 안좋게 박혔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급을 나누는 건 편협한 시선이다.

 

왜냐하면 세상 어떤 예술에도, 심지어 삶에도 클리셰는 녹아있으며, 또한 없어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가령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에서 지적했듯, 문단에도 유행과 클리셰는 존재한다. 

 

사르트르 이전 프랑스 문학은 오로지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적인 성격을 띈 작품들만 존재했다.

 

심지어 회화에 흔히 '기법'이라 불리는 것들도 결국 유행이며 클리셰다. 

 

클리셰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자면 진부한 연출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대중들이 가장 선호하는 연출이기에 여러 곳에서 쓰이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클리셰를 얼마나 처바르던 예술성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전부 쓰자니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하겠다.

 


나는 적어도 한국 영화보다는 일본의 애니 쪽이 작품성 자체도 더 높다고 본다.

 

간단한 예로 2018년부터 스크린에 상영된 한국 영화는 대략 700편 정도다.

 

또, 한국의 영화 시장 규모는 1.7조 정도. 

 

반면 일본에서 한 분기에 방영되는 애니는 대략 50개. 1년이면 200개 남짓이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의 규모는 27조 정도이다. 

 

수치만 봐도 대략 감이 잡힌다. 

 

2조원의 시장에서 700편이 나오는 한국 영화계와,

30조원의 시장에서 고작 200개가 나오는 애니메이션 업계.

 

간단하게 말하자면 후자가 경쟁이 훨씬 치열하다는 말이며, 예술계에서 치열한 경쟁은 곧 질 높은 작품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질이 높다는 것은 순수 예술과 대중성 사이의 큰 벽이 있기는 하다.

가령 사람들은 1000만 명이 본 상업 영화보다는, 100명이 본 소위 '예술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를 더 높게 치는 경향이 있다.

 

내 관점부터 말하자면 둘은 어떤 차이도 없으며, 굳이 우위를 따지자면 대중성이 높은 쪽이 그나마 더 예술적이라고 하고 싶다.

여기에 관해선 또 할 얘기가 산더미처럼 많지만 이 포스팅은 늑대아이 리뷰 포스팅이다.

그래. 떠들다 보니 여태 잊고 있었다. 

이거 리뷰 카테고리였다.

 

잡설이 상당히 길어져서 3부에서 제대로 리뷰하겠다...

 

한 줄 요약 

 

1. 예술에 급 나누길 좋아하는 인간들은 대개 편협하고 이중적이며, 더불어 본인은 절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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